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 저/한성숙 역 | 민음사
이상한 소설이 있다. 단지 낯선 세계, 낯선 언어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함은 낯섦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노스탈지아』는 이상한 소설이 맞다. 하지만 이 작품엔 낯섦뿐 아니라, 묘한 친숙함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다.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긴장감은, 독자를 불안하게 하고 설레게 하고 두렵게 할지도 모른다. 다층적인 의미로 소름 끼치게 하는 『노스탈지아』는 정말 이상한 소설이다.
편집자의 자아로서 이 작품을 평가하자면, 정말 괴로운 작업이었다. 일단 루마니아어를 알지 못하므로, 최종 원고와 원문을 대조해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었다. 로망스어와 슬라브어 사이에(루마니아의 지리적 위치 자체가 그러하다.) 위치한 듯한 루마니아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지에서 밀려오는 현기증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그런고로 영어와 독일어 번역본을 대조해 가며, 마치 로제타석을 통해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해독해 낸 샹폴리옹처럼, 『노스탈지아』를 우리말에서 루마니아어로 다시 거꾸로 읽어 나갔다. 이때 내가 깨달은 바는, 이 작품이 정말로 이상하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마술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완벽히 ‘환각적’인 문장으로 축조된 이 신기루 같은 성채(城砦)는 무려 600쪽에 이르는데, 책을 깨나 읽어 본 사람들조차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다.
『노스탈지아』는 작품의 구조부터 독특하다. 이를테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노스탈지아』라는 제목 아래 엮인 세 편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데, 이 다섯 편의 작품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묘하게 괴리되어 있다. 프롤로그엔 총알을 전부 장전한 리볼버로 (승산이 전혀 없는) 러시안룰렛에 도전하는 ‘룰렛 승부사’의 남루한 삶이 기록되어 있고, 에필로그엔 자동차 경적에 매료되어 점차 우주적 화음을 창조해 내는 어느 건축가의 이상야릇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갸우뚱한데, 『노스탈지아』 속에 자리한 세 작품, 즉 「말라깽이 꼬마」와 「쌍둥이자리」, 「REM」은 한결 기묘하다.
「말라깽이 꼬마」는 부쿠레슈티의 어느 공동 주택 단지를 배경으로, 순수한 만큼 잔혹한 어린아이들의 난장(亂場)을 보여 준다. 마땅히 놀거리가 없는 그곳 아이들은 일종의 ‘술래잡기’라고 할 수 있는 ‘뾰족 마녀 놀이’를 하염없이 즐기는데, 사실상 그것은 놀이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들 무의식 속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를 실현하고 억압하는 장엄한 의례다. 아직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오직 몸짓으로 세상과 맞서던 그들 앞에, 불현듯이 ‘말라깽이 꼬마’가 나타난다. ‘말라깽이 꼬마’는 정신을 전율하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주의 이치를 설교하면서 차츰 그곳 아이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다 모종의 사건으로 왕좌에서 폐위당한 ‘말라깽이 꼬마’는, 처음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진다.
「쌍둥이자리」는 조금 더 성장한 이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안드레이와 지나의 특이한 관계를 묘사한다. 그들은 연인처럼 어울리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방식의 사랑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몸을 공유하던 쌍둥이가 분리되어 한없이 예전의 반쪽을 그리워하는, 밀어냄이 곧 끌어당김을 부추기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특수한 인연은, 지나가 자신을 촬영한 슬라이드를 벽에 비췄을 때, 그 영사된 얼굴이 안드레이의 모습과 포개지는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러고는 어느새, 그들 두 사람은 안티파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서 있다. 글을 읽는 사람마저 반마취 상태에 빠져 있다가 가까스로 깨어난 기분이다. 안드레이와 지나는 그곳에서 모든 생명체의 발생과 진화를 단 하룻밤 사이에 체험하고, 마치 최초의 인간이 된 것처럼, 박물관 앞의 텅 빈 광장으로 유유히 빠져나온다.
「REM」은 더 나아가 권태로운 성인들의 일상을 취재한다. 화자는 꿈을 엮어 내는 거미의 눈으로 두 남녀의 나른한 관계를 관찰하다가, 돌연 ‘나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스베틀라나의 과거로 곤두박질친다. 이야기는 다시 「말라깽이 꼬마」의 어린아이들이 ‘뾰족 마녀 놀이’를 즐기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어느 과거의 정경을 비춘다. 어린 스베틀라나는 병을 앓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직장을 다니는 아버지로서는 혼자 돌볼 수 없는 처지라, 잠시 이모네 집에 머물게 된다. 도시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모네 집은, 마치 현실이 끝나고 꿈으로 이어지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듯하다. 그 동네 여자아이들은 매일같이 모여서 해가 저물 때까지 놀기를 반복하다가, 난데없이 ‘여왕놀이’를 시작한다. 그것은 여자아이들 각각이 일곱 가지 색깔, 일곱 가지 꽃, 일곱 가지 보물을 가지고 이레 동안 번갈아 여왕이 되는, 그리고 그날의 여왕이 된 아이의 명령에 따라 무엇이든 해야 하는 신기하고 불길한 놀이다. 하루하루 저마다 여왕의 왕좌에 앉은 일곱 명의 아이들은, 누구나 골목길이나 뒤뜰에서 즐길 법한,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놀이를 주최하지만 매번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의 선을 건너뛸 때마다 십 년 뒤의 미래가 환영처럼 떠오르고, 거인의 해골이 나타나거나 방 전체가 부쿠레슈티의 상공으로 날아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주인공 스베틀라나는 이모네 집에서 저 멀리 들판으로 건너다보이는 탑, 그곳에서 살고 있는 키다리 에고르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에고르는 주인공에게 작은 조개껍데기를 건네며, 그것을 베개 밑에 넣고 잠들었을 때 떠오르는 꿈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당부한다. 인류의 모든 소망은 꿈속에 자리한 REM에 다다르는 것이며,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스베틀라나뿐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소녀는 REM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을까? 아니면, 다시 현실로 붙들려 와서 별달리 특별할 것 없는 어른이 되어 버렸을까?
『노스탈지아』는 본래 1989년 『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가 독재 정권의 검열 탓에, 1993년에야 온전한 형태로 출간될 수 있었다. ‘꿈’이라는 제목이 ‘노스탈지아(향수)’로 바뀐 것도 제법 의미심장하다. 꿈은 깨어나면 잊게 되지만, 과거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요컨대,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이들의 청춘을 ‘꿈’ 같은 환영으로 만들어 버렸다면, 결국 압제가 물러난 뒤에 되살아난 것은 그 고통스러운 지난날마저 그리워하는 ‘향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태어나, 두려운 독재를 경험하며 성장한 커르터레스쿠에게도 이제 과거는 꿈처럼 잊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간절히 향수해야 할 기억으로 다가왔을 터다. 왜냐하면, 시간은 불가역적이므로,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과거란 언제나 향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대로 감당하기엔 버거운 과거도 있기 마련이다. 저자에게 향수는 고통과 두려움, 찬란함과 애틋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감각이다.
따라서 『노스탈지아』는 그 모든 것을 감싸 안기 위해 이러한 글쓰기, 일종의 환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이상함은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과 익숙함을 환기하면서도 불현듯이 공포에 질리게 하는 로르샤흐의 데칼코마니처럼, 그리고 다정하게 마주 앉은 연인의 모습이 돌연 죽음을 암시하는 해골로 변하듯이, 이 소설은 매 순간 섬뜩한 그리움을 선사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내면을, 정신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헤집어 놓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노스탈지아』는 바로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아주 희귀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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