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준의 오목렌즈] 116번째 기사입니다.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어김 없이 마주하게 된 4월 중순의 어느날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12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월호에 대한 폭력은 존재한다. 스레드에서 ‘김폰지’라는 가명을 쓰는 사람은 “세월호 리본 지금까지 붙이고 다니는 사람 중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세월호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캡처=스레드>
그 세월호 노란 리본을 12년 동안 표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박성준 센터장(다소니자립생활센터)이다. 박 센터장은 “사람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온도차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누군가 나에게 12년째 세월호를 얘기하고 있는 이유가 뭔지. 12년씩이나 됐는데 아직도 안 내리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운을 뗐다.
난 그런 것 같다. 내가 스스로 그만 추모해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안산에 무슨 추모공원이 확실하게 들어서서 여기에 가면 365일 추모할 수 있다라는 확신이 서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이 좀 있어야 된다. 지금 준비 중이라고 그랬는데 개관 소식은 아직 못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르겠다. 내가 언제까지 이걸 유지하고 있을지는.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 당분간은. 이 당분간이라는 게 빨리 나의 프로필 사진으로 노란 리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제 살짝이라도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제 놓아줘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라고 생각을 한다. 나도 이제 어느정도 언제까지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 시점은 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그런데 그 시점은 분명 있다.
2026년 4월16일 14시20분. 박 센터장과 세월호 12주기 특집 오목렌즈 전화 대담을 진행했다.
박 센터장은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과 카카오톡 게재 사진으로 12년째 노란 리본을 걸어놓고 있다. 한 마디로 ‘부채의식’이 컸다. 박 센터장은 “부채의식이라는 게 계속 남아 있는 것 같다”며 “(1977년생으로서) 난 그 당시에 30대 중후반이었으니까 빼도 박도 못하는 성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태어난 해에 난 대학생이었다. 나는 97학번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해에 나는 40대를 바라보는 어른으로서, 성인이 된 뒤로도 그 아이들의 나이만큼 시간을 보냈다. 그 희생된 청소년들의 나이만큼을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2014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97년생들인데 그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가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나에게 너무나 강렬한 부채의식으로 남았던 것 같다. 기본적인 구조도 하지 못하는 부끄럽고 처참한 나라의 어른이라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2019년 4월에 개봉한 영화 <생일>을 보면 세월호 유족들이 어떤 심정으로 사건 이후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목도할 수 있다. 박 센터장은 “모든 참사들에서 가장 아파하고 가장 끝까지 슬퍼하는 분들이 유족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분들하고 비견될 건 아니지만 나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 당시만큼은 국민들 전체가 집단적으로 좀 슬픔을 느끼지 않았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단종의 마음에 이입한 국민들이 많아졌고, 이제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단종의 장례를 지내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더라. 아마 적어도 2014년 4월 한 달 동안은 국민 전체가 상주가 됐던 기간이 아니었을까.
세월호 참사가 한국 사회를 휠씁고 간 뒤에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대형 참사가 2건이나 더 일어났다. 이태원 참사와 무안 참사가 뒤를 이었고 앞으로 이런 참사가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문제인 걸까? 박 센터장은 “안전 시스템이나 매뉴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과 매뉴얼을 돈과 무사안일주의로 무시하게 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다”고 역설했다.
시스템은 마련되어 있는데 그 시스템 속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기 업무에 충실하지 않거나, 거대 조직이 돈과 비용 때문에 안전 문제를 소홀히 하고, 또 그들을 처벌하는 법률 체제가 엄격하지 않은 편인 것 같다. 대형 참사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들을 평소에 해야 되는데 평소에 전혀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평안함을 즐기다가 사고가 나서야 그때 조금 들여다본다.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왜 사후에 살펴보는지 그것이 가장 큰 문제 같다. 사실 외양간 자체를 만들어놓긴 했는데 소를 키워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사고가 터지기 전에는. 외양간을 튼튼하게 만들어놔도 주인이 소를 제대로 안 키우고 있는 상황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월호라고 하면 정치적 진영논리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다. 세월호를 거론하는 순간 그 당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정치적 책임 추궁의 소재가 되는 것으로 여겨, 되려 유족들을 공격하거나 비하하는 반응으로 악화되곤 했다. 박 센터장은 “공동체 전체의 문제인데 정치꾼들과 몇몇 사람들은 정치적 유불리의 소재로만 바라보고 있다”며 “사실 공동체 전체의 비극으로 인식을 한다면 함께 울어주고 아파해주고 공감해주지 않을 수가 없다”고 설파했다.
자신이 서있는 위치가 보수라고 해도 그 당시에 적어도 침묵하는 정도의 스탠스를 보였어야 했는데 많은 보수진영 인물들이 유족들에게 모질게 굴었고 지지자들은 더욱더 공격적이었다. 극히 일부라고 해도 막말을 일삼는 인물들의 언행이 눈에 많이 띄었고 유족들에 크나큰 아픔이 됐을 것이다.
박성준 센터장이 카카오톡 사진으로 게재해놓은 이미지. <사진=박성준 센터장 카카오톡>
물론 문재인 정부 집권 시기에도 세월호 문제는 매듭을 짓지 못하고 계속해서 공전했다. 박 센터장은 “20~30대 젊은 친구들 즉 그 당시에 세월호를 겪었던 청년들이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으로 일부 기울었던 배경”이 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 세월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답답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컸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던 그 청년들 대부분의 생각은 뭐였냐면 기회가 있었으나 빨리 정리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이 굉장히 많더라. 국정농단과 촛불집회로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를 쫓아내고 문재인 정부를 선택했는데 그때 표심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주문이 들어가 있다. 그 과정에서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빨리 털고 싶었던 건데 그거를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 컸다. 어떤 결론이든 빨리 결론을 맺고 전환을 하고 싶었던 느낌이 되게 강했는데 문재인 정부가 그 전환을 못 시켰다. 그 부분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이유가 됐다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1997년생이면 올해 딱 서른이다. 세월호 세대 청년들은 어떤 집단 특징을 공유하고 있을까? 박 센터장은 “세월호 사건을 생생하고 지켜본 세대라서 좀 더 국가에 대한 생각과 깊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그 당시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느냐 지지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의 삶이나 본인들의 미래에 있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대한 고민들을 굉장히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호의 기억이 본인의 삶에 어떤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국가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이나 역할에 대해 다른 세대보다 더 깊이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국가라는 것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 세대가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20~30대의 정치화에도 세월호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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